장안마을 명칭 변천사 개요

장안(長安)마을 기록 혹은 기원을 알수는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인 1910년경 부터 본격적인 호적제도의 등장 등으로 마을단위까지 세분화된 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장안말 이후 최초기록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조정하며 처음 장안리로 기록 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1861년 편찬된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가 혁신적이긴 하나 이 지도들 또한 현단위의 기록한계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외 공부상 기록인 과거 입시자의 방목기록 또한 기록 매체(목판인쇄)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출생지를 양성인 등 현을 중심으로 표현 했다.

장안동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북태평양의 서쪽에 위치하며,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 한다.

여지승람도

대동여지도

1. 개요

진위군(振威郡)은 현재의 경기도 평택군, 평택시의 옛 행정구역으로, 삼국시대부터 다양한 변화를 거쳐 발전해 왔습니다. 연도, 왕조, 시대별 연혁은 다음과 같습니다.

2. 진위군의 연혁

3. 평택지역의 발전과 평택시의 탄생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명된 이유는 평택역의 영향이 컸습니다. 1905년 경부선 평택역이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에 설치되었는데, 당시 안성천 건너편이 충청남도 평택군이었기 때문에 역 이름이 ‘평택역’으로 정해졌습니다. 이후 평택역 주변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평택’이라는 명칭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진위군의 중심지가 평택역 주변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1931년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개칭되었고, 1938년에는 평택면이 평택읍으로 승격되면서 진위군 자체가 평택군으로 개명되었습니다.(최초의 군과 면단위 행정구역 명칭의 전도) 이후 평택군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현재의 평택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1914년(일제강점기): 경기도 진위군의 일탄면, 송장면, 여방면이 통합되어 송탄면이 탄생. 경기도령 제3호 (1914년 3월 13일)
  • 1938년:진위군을 평택군으로 개칭 하였다. 조선총독부령제196호(1938년9월 27일)
  • 1963년: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 법률 제1177호 읍설치에관한법률 (1962년 11월 21일)
  • 1981년: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 평택군에서 분리, 동부동 설치. 법률 제3425호 광명시등시설치와군관할구역변경에관 한법률(1981년 4월 13일)
  • 1995년: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이 통합되어 평택시가 됨. 법률 제4948호 경기도평택시등5개도농복합형태의시설 치 등에관한법률(1995년 5월 10일)
  • 1996년: 평택시 동부동이 송탄동으로 개칭. 평택시 조례 제197호(1996년4월19일)
  • 1998년: 평택시 도원동이 송탄동에 통합.평택시 조례 제353호(1998년10월1일)

※ 송탄 고유의 지명이 아니며, 태생부터 행정단위의 명칭이다. 따라서 그 명칭은 송탄면, 송탄읍, 송탄시, 송탄출장소, 송탄동 등 행정청의 명칭을 통하여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마을 명칭 변천사 개요

  1. 고대~조선 시대
    • 삼국 시대부터 고려, 조선 시대까지 지방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마을 이름이 공식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 조선 후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동국여지승람(1481년), 대동여지도(1861년) 등을 통해 전국의 마을 이름이 문서로 남았습니다.
  2. 일제강점기 (1910~1945년)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많은 마을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 일부 지역은 일본식 명칭으로 개칭되었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마을 이름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현재)1960~1980년대 도시화 및 산업화로 인해 마을 이름이 변경되거나 통합되었습니다.
  4. 1995년 도농복합도시 출범으로 인해 많은 지역에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으며, 이에 따라 마을 이름도 변화했습니다.
  5. 최근에는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일부 지역에서 옛 마을 이름을 다시 사용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장안부락(長安部落)

장안리는 조선시대에 삼남대로(三南大路)가 동(東)으로지나고 동막(東幕)으로넘는 작은흰치재(고개)를 통하여, 삼남대로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있어 비교적 문물의 교역이 활발하던 곳으로서, 130 여년전에는 市場이 있던거리가 있었다 하여 통상 ‘장안말’ 로불렸다.

한자로 표기할때 길 長과, 延安車氏집성촌에서 편안할 安자를 따서 長安이라 쓴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하나, 순수히 장터 안 마을 이란 의미에서 유래 장안말로 불렸을 것이고, 長安은 이를 단순히 한자로만 쓰기위한 의미만 지닌다고 봄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장안리는 주로 연안 차씨 · 광주 이씨 · 나주 정씨 등이 大姓으로내려오다가車氏門中이크게자리하여오늘에이르는마을이다 (1994년 송탄시사)

장안동(長安洞)

장안동은 조선후기 양성현 지역이었다. 1895년 23부제 실시로 진위군 송장면이 됐고, 1914년 송장면이 탄현면과 통합되면서 송탄면에 속하게 됐다. 지리적으로 장안동은 동쪽으로는 큰 흰치고개에서 갈라진 작은흰치고개와 이어졌고, 양성군 동항리에서 도일동을 거쳐 포승읍 괴태곶까지 이어진 길이 마을을 지났다. 마을 안쪽에 장시場市가 발달해 장안동이라고 했다.

장안동의 대성은 광주이씨와 연안차씨다. 연안차씨의 상징적 인물은 고려 말 간의대부를 지냈던 문절공 차원부다. 광주이씨는 경제기반이 탄탄했다. 특히 이용손은 지주였으며 사회적으로도 인망을 얻었다. 1939년 흉년 때는 장안동에서 송탄고등학교 방향으로 연결된 도로를 확장해 칭송을 받았다. 장안동에는 국제대학교와 국립한국복지대학교가 있으며, 부락산 아래에는 은혜중·고등학교가 있다. 장안동은 2009년 이래 마을 대부분이 재개발됐다. 전통마을의 자취는 사라졌고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2014평택시사)

실사영상속에 마을내 지명

장안리 마을속에는 외부에 기록되지 않은 지명이 있다. 장안은 어찌보면 최소 단위의 지명이지만 그 내면에는 그 땅에서 살아온 후손만이 아는 아기자기한 세상이 있었다. 아마, 어느 지도와 기록에도 없는, 일차원의 도로명주소나 이차원의 지도가 아닌 각각의 다양한 3차원 공간이 있었다. 오직 그 속에 터잡아 살아왔던 사람만이 통할 수 있는 증표 같은 지명일 것이다.

마을민이 부르던 마을내 작은지역 지명

역마바위와 아기장수 전설

• 위치: 장안리 중봉
• 형태: 사방 2m의 바위(물혀있는 부분 제외)로 말 발굽형의 패인 부분이 있다.

장안리에서 동쪽으로 정두진(오북동,현재국제대학교 정문)씨의 농가를 지나 1km쯤 가면 길 왼쪽으로 중봉 산을 찾을 수 있다.
산을 북쪽 기슭에서 북쪽 능선까지 올라 좌측으로 살펴보면 약간 돌출된 가로 1m, 세로 70cm 정도의 바위를 보게 된다.
바위 중앙부에는 직경 10cm 정도의 원형 홀이 있으며, 그 형태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같이 말발굽형이라 할 것이나, 완전한 같다고 할 수 없다.

이 바위가 지닌 이야기는 옛적에 한 장군이 있어, 그가 무술 연마하고 말을 달릴 때에 지금의 부락산(佛樂山,負樂山 등으로 진위현지, 군지, 각 문중 족보 등에 표기하였음)에서 말이 뛰어 중봉 산록에 내리니, 말의 발굽이 바위에 찍혀 움푹 패였고, 그때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 온다고 한다.(1994 송탄시사)

빈대바위와 파계승전설

빈대바위 위치: 장안동 대수골(현 국제대학교 부지 주변)

전설형태: 바위, 약수터, 서낭목

빈대바위는 부락산(負樂山) 동편 소골봉 가슭에 자리한 반구형의 돌출된 바위를 일컫는다. 높이 5m 폭 7~8m의 반구형 바위로 500여년전에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한다. 빈대바위를 중심으로 작은 약수터가 있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어 스님이 기거 하였다. 유학을 중시하고 불교를 배척한 조선시대에는 양민들의 빈곤과 사회의 혼란으로 스님들은 수도에 전념할 수 없어, 스님들도 부패에 물들기 쉽고 이런 스님들을 파계승이라 한다. 이절의 스님도 염불보다 잿밥에만 맘에 있는 파계승이었다. 계율을 어기는 수도승을 훈계하려는 부처의 뜻은 절뒤 바위에서 빈대가 나와 괴롭힘을 주었으나 수도승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결국 견디다 못한 수도승은 파계를 하고 절을 떠났으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바위만 남아 사람들은 ‘빈대바위’라 불렀으며, 이 바위가 영험한 것이라 보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바위 주변에는 서낭목이 있고 측면으로 소골봉(부락산 정상)에 오르는 100여개의 돌계단이 있으며, 봉우리 정상에는 무속신앙의 일환으로 보이는 돌탑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정상부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 매년 추석에 소골(현재 우곡마을), 동막, 장안마을 주민이 모여 씨름, 횃불놀이, 달맞이 등의 행사를 했었다고 전한다.

현대에도 이곳은 무속인들의 발걸음이 잦아 무속신앙의 터전이 되어 간혈적으로 만신들이 수양하고 굿도 한다. 빈대바위 주변은 검게 그을르기도 하였고 낙루된 촛농증이 많고, 서낭목인 참나무 고목에는 청 · 홍색의 띠가 메어져 있다 . 빈대바위 아래로 20미터쯤 은혜중고등학교와 국제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1994 송탄시사)